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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7-18 Fever Pitch

알못의 풋볼토크 | 그럼에도 나는 왜 구너인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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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창단

챔피언스리그 우승 없음

12시즌째 리그 우승 없음

 

그럼에도 나는 왜 구너인가?(1)

: 아스날에 뛰고 있는 선수들을 "Gunner" 아스날 팬을 "Gooner"라 한다.

 

 

1. 내가 축구에 빠지게 된 이유

1) 유일한 취미

어릴적 내가 살던 곳은 깡촌이었다.(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시내에 나가 '동네'가 아닌 '마을'이라는 단어로 내가 사는 곳을 소개하면 무슨 '옛 고을'에서 온 것 마냥 또래들은 신기하게 바라봤다. 뭐 사실 업신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시골마을에서 공부에 흥미가 없던 내가 관심가질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초등학교, 중학교때까지 한반이냐 두반이냐의 차이만 있을뿐 항상 똑같은 친구들과 똑같은 놀이를 반복했다.

 

우리는 매 쉬는시간마다 복도에 나가 떨어진 3선 슬리퍼를 아이스하키 퍽 모양으로 잘라 교실 앞문과 뒷문 넘어를 골대로 정하고 축구를 했다. 등교 할 때, 점심시간, 방과후 할 것 없이 뛰어 놀았다. 종목은 유행에 따라 갈리긴 했지만 대부분 축구였다.

 

94년이었나? 미국 월드컵에서 황선홍, 서정원, 홍명보 트리오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당시에는 그 어떤 슈퍼스타들보다 축구선수가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98 프랑스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차범근호는 네덜란드와 맞닥드려 5:0으로 굴욕적인 패배하게 된다. 이때 가장 눈에 띄는 선수는 베르캄프였다.

 

그뒤로 PC게임이라는 놀이문화의 신세계가 열렸다. 지금의 핸드폰 게임보다 조악한 기술로 만들어진 게임이지만 심심한 나에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선물이었다. 스타크레프트, 레인보우식스, 피파99는 그 시절 나를 피폐하게 만든 원흉이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내가 살던 곳은 깡촌이었다. 인터넷을 하려면 PC와 연결된 모뎀을 전화선에 연결해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등으로 접속해야 했다. 비용이나 속도면에서 최악이었기에 우리는 이 방식을 선호하지 않았다. PC방을 이용하려면 버스를 두번 갈아타야 했기에 누군가의 집에 모이게 될때면 PC 한 대로 2인 플레이가 가능한 피파99를 많이 했다. 피파99에서 내가 좋아하던 선수는 3명이었다. 호나우두, 델 피에로와 데니스 베르캄프.

 

2) 아스날과의 만남

그 뒤로도 피파를 즐겨했다. 퍼스트 초이스는 레알 마드리드였지만, 세컨드는 아스날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선택하면 알파벳순으로 가장 첫번째로 뜨는 팀이 아스날이었다. 게다가 베르캄프도 있겠다. 팀 밸런스도 굉장히 좋았다. 그렇게 나는 아스날과 만나게 됐다. 그때가 아마 피파 2000이 나왔던 시기였던것 같다. 그러다 한동안 나는 피파를 하지 못했다. 최신버전의 피파를 내 PC가 너무 버거웠했기 때문이다.

 

3) 2002년 월드컵 다시 시작된 축구 뽐뿌

2002월드컵은 대한민국을 미치게 만들었다. 당시 나는 고3이었지만 실습을 나갔기 때문에 심리적 부담이 '0'에 가까웠다. 우리는 늘 즐길것을 찾아다녔고 그 시기 월드컵은 만화책과 비디오로부터 벗어날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언터쳐블, "대한민국"이라는 네음절의 함성만 가지고 있으면 어디든 환영받을수 있었다. 모르는 사람과 얼싸 안고 방방 뛰어도 어색함이 없고, 키스를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이상한 분위기였다. 2002년 여름 아마 나는 베이비붐 시대를 경험한듯하다.

 

4) 군생활 시작

2004년 해군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2005년부터 배를 타게 됐고, 다행스럽게도 내가 탄 배는 최신예 구축함이었다. 작은배들에 비해 풍부한 여가거리를 즐길 수 있었다. 특히 배에는 플스와 위닝이 있었다. "♡개꿀♡"